한 개인의 성장 과정을 전부 영화로 보게된다면, 최대 배속으로 돌려도 너무 지루한 탓에 자는 게 낫다. 우리 세대의 사람의 생애주기는 아마 100년. 관찰할 수 있는 기간이 제한되며, 주변에 표본이 매우 적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개개인만의 일상적인 분투를 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하루하루 성장 해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듯 하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라는 표현이 매우 거슬리지 않는가? 적은 표본을 전부로 착각하여 스스로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으로 위장되는 상황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렇다 라는 수많은 가짜뉴스가 진실을 가리고 있기에 저 표현을 유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을 드러내기 시도하다.
어떤 생각을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상대도 너무 쉽게 판단을 내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듬고 다듬고 다듬어 내보내곤 한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여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매번 문제-해결식 구조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나의 디폴트는 정답을 찾다가 결국 고장나고 만다. 갑작스런 고장의 현장을 목격하게된 사람들은 또 그들의 시선에 맞춰 해석하고 결론 내릴 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까? O일까? X일까? 검정일까 하양일까? 나는 그사이 무수한 회색을 권하고 싶다. 그 회색은 밝기나 채도, 명암, 선명도가 정해지지 않았다. 그건 각자 선택의 몫이다. 이를 아우르는 말은 회색지대로 어느 시점에 어느 지점에 딱! 머무를지 모르는 회색이들이다. 그러니 내가 상상해낸 타인의 시선틀을 외면하고, 이 곳을 나만의 실험의 장으로 만들고자 한다.
나 = 완벽주의자
‘완벽주의자’라는 용어는 의외로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이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 그런 사람은 정말 지독하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컸다. 간혹 누군가 나를 그렇게 묘사하면 절대 아니라면서 손사래를 치곤 했다. 겸손의 뉘앙스도 있었지만, 나같이 덜렁대는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왕관이었다. 하지만 이 단어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의외로 자기계발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완벽주의자는 완벽한 준비상황이 아니라서 시작조차 어려운 사람, 자신이 목표하는 완벽한 최종 단계의 모습이 아니라고 판단해 결국 습관의 문턱에서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완벽하지 않을 바에 시작을 포기하고, 완벽한 정상에 오르기 전에 기회를 날려버리는 완벽주의자. 이 새로운 정의에 의해, 처음으로 내가 완벽주의자에 해당한다는 겸손없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하루하루의 작은 시도, 성장 과정
결국 나의 충실한 문제-해결모드로 돌아와서, 작은 시도를 반복하는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하였다. 물론 이런 생각도 몇 년 전부터 존재했었다. 부지런히 수행중이라 착각도 잠깐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나라는 인간에 관한 실험 기록들을 남기고자 한다. 분명 서투를 것이다. 이러한 양식의 자아탐구형 다이어리도 처음 작성해 보고, 젊은 세대이지만 컴퓨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다루고자하는 내용은 누군가의 시선에 맞추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나의 생각의 현주소들을 더욱 심화시켜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후기들을 읽어보며 영감을 얻기도 하기에 그러한 부차적인 선순환도 기대해 본다. 작게 빠르게 여러번 실패하기도 대업을 위해선 필수적 과제다. 그 절망에 올라타 기어코 얻어낼 무언가를 기록해보고자 한다.
Pingback: 집중으로 들어가는 '문'의 조건 - Elevator-7F